

엔딩크레딧
-적선
그 즈음, 아카아시는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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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를 망치는건 상상력이래요. 혹시 걱정을 너무 많이 하는 것 아니에요? 잘 보이고 싶은 사람 있어요? 아, 그러시구나. 연인은 아니고. 친구. 선배예요? 너무 잘 보이려고 애쓰지 마세요. 원래 아카아시씨같은 분들이 많이 찾아오거든요. 평온해 보이는데 머릿속은 엉망진창이죠. 어둑어둑한 영화관을 떠올려봐요. 스크린에는 두 사람의 영화가 나오고 있어요. 아카아시씨와, 아카아시씨의 가장 소중한 사람. 평생을 함께하고싶은 사람이에요. 2시간 10분동안 두 사람의 시간이 흘러요. 과거의 추억부터 시작해서 현재까지. 영화는 지금 거의 막바지예요. 마지막 10분이 남았어요. 어떤 생각이 들어요?
영화가 끝나면 어떻게 되나요?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이 영화는 미래를 보여주진 않아요. 정확히 아카아시씨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에서 끝나버려요.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미래가 없다면서요.
저는 영화가 끝나는게 두려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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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여행을 제안했을 때 그는 3초만에 대답했다. 눈을 크게 뜨고 1초, 함빡 웃는데 2초, 응! 하고 대답하는데 3초. 늘 그렇듯 일단 대답하고 어디로 갈건데, 라고 묻는다. 아카아시는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말했다.
"바다 보고싶어요."
"바다? 저번여름에 다녀왔잖아. 부원들이랑 다같이."
"다같이 말고...둘이서요."
"조용한곳에 가고싶은거야?"
"네."
보쿠토는 뒷목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생각하는가싶더니 또 흔쾌히 대답했다. 그 짧은 고민이 수락과 거절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음에도 불안감이 스멀거렸다. 부쩍 제 판단력에 자신이 없어졌다. 이것도 우울증 때문이겠지. 아카아시는 한번 진단을 들은 이후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그놈 탓으로 돌렸다. 그게 편했다. 억지로 우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싶지도 않았고. 다만 자신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기로 했다. 아카아시는 극장의 빨간 의자에 앉았다. 보쿠토와의 추억을 담은 필름이 그리운 소리를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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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쿠토가 자신만만하게 데려온 곳은 자그마한 별장이었다. 설마 이거 보쿠토씨네. 라는 말은 신나서 뛰어가는 뒷모습에 막혀버리고 말았다. 잘 사는 집이라는건 알고 있었지만 평소 행실에선 전혀 티가 나질 않아서, 이런 식으로 한번씩 터트려주는게 정말 적응하기 힘들었다. 그건 제쳐두고, 아카아시는 이곳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사유지라 여행객은 일절 들어오지 않는데다 바다도 깨끗했다. 무엇보다,
"앗, 차가워!"
무작정 물에 뛰어들어갔다가 후다닥 뛰어나오는 저 사람. 아카아시- 물 너무 차가워- 라며 징징대는 그가 있는 풍경이 참으로 예뻤다. 아카아시는 이 계절에 물놀이는 무리예요. 라며 연하게 웃었다. 아카아시는 그저 바다가 '보고'싶었던 것 뿐이고, 물의 온도에 식겁한 보쿠토도 얌전히 별장 테라스에 앉았다.
날씨는 야외에 앉아있기 딱 좋았다. 적당히 선선한 바람에 바다내음이 실려왔다. 아카아시는 별장에 있던 책 한 권을 찬찬히 넘겨보는 중이었다. 팔락, 솨아아, 팔락, 솨아아 두 소리가 규칙적인 리듬을 만들어냈다. 보쿠토는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테이블에 머리를 기대었다. 길다란 손가락이 종이를 넘길때마다 호박색 눈동자가 따라 움직였다.
"보쿠토상, 혹시 할 말 있어요?"
여전히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아카아시가 물었다.
"아아니! 딱히 없는데."
"그럼 심심하다던가?"
"아냐. 나 지금 무지 즐거워. 기분 좋아."
흘긋 그를 쳐다보니, 자신을 보는 두 눈이 햇살을 담은 채 빛나고 있었다. 그가 씩 웃어보였지만 아카아시는 모른 척 시선을 거두었다. 뚱한 얼굴이 언뜻 보인 듯했다. 정말로 기분좋아보이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도 그 마음의 울림을 믿을 수가 없었다. 혼자만의 착각이 아닐까하는 의심이 들었다. 또다시 꼬이기 시작한 상념을 깬건 보쿠토의 목소리였다.
"무슨 책 읽는거야?"
"<폭풍의 언덕>이요."
책을 돌려 보여주자 미간을 찌푸리며 표지를 살펴본다. 읽어보진 않은 모양이었다.
"무슨 내용인진 모르겠지만 제목부터 어두침침해."
"전체적으로 그런 분위기예요. 그래도 나름 해피엔딩이에요."
"읽었던 거야?"
"네. 좋아하는거라서."
"아카아시는 해피엔딩 좋아해?"
다시 책에 집중하려던 아카아시는 뜻밖의 질문에 책을 펼치다 말았다. 해피엔딩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나. 물론 있을 수도 있지만, 행복은 누구나의 바람이니까.
"좋아...하죠."
"나도 좋아! 해피엔딩."
무슨 말이 하고싶었던걸까. 웃음 뒤에 묻힌 다른 말이 있었던 것 같지만, 보쿠토는 배고프다며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이내 다시 나타나서 고개를 빼꼼 내밀곤 아카아시는 뭐 먹을래? 라고 묻는것에 아카아시도 책을 덮고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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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장에는 자그마한 프로젝터가 있었다. 보쿠토는 해가 지자마자 익숙한 손놀림으로 착착 세팅을 하곤 간식까지 양손에 들고 나타났다. 영화가 시작되었을때 밖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커튼을 치고, 밤보다 더 어두운 거실에서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 무슨 영화였는지는, 글쎄. 아카아시가 기억하기로는 아주 긴 도로를 누군가가 걷고 있었던 것 같다. 끝이 보이지 않는 황야에 난 단 하나의 길.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서, 드륵드륵 소리를 내며 쓸쓸하게 걸었다. 막 연인과 헤어진 참이었고 울고있지는 않았다. 세상 모든 슬픔을 캐리어에 넣고 걷고 또 걸었다. 아카아시는 그걸 보며 무겁겠다. 라고 생각했다. 함께 걸어줄 사람이 있다면 좋을 텐데.
여자의 발걸음을 따라 기억이 조금씩 펼쳐졌다. 행복했던 기억, 싸웠던 기억, 연인과 멋진 휴가를 떠난 기억. 가장 잔인한 기억에서조차 두 사람이 있는 풍경은 아름다웠다. 별이 쏟아지는 바닷가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놓았고 해가 떴을 때 여자는 혼자였다.
결국은 혼자가 되는구나.
이 영화는 새드엔딩인걸까.
아카아시는 팝콘을 손에 든 채 옆을 돌아보았다. 보쿠토의 얼굴엔 아무 표정도 떠올라있지 않았다. 시선을 느낀 듯 그가 쿠션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힘들어보여."
"그러게요."
"저 사람, 집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까?"
"......"
아뇨. 시간은 10분가량밖에 남지 않았고,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질 것 같진 않아요. 여자는 황야를 헤매다 주저앉아버릴거예요. 데리러 올 사람도 앞에 보이는 것도 없잖아요. 쓸쓸히 차가운 밤을 맞이할거예요.
"저렇게 무거운 짐이 있는데, 혼자 두고 간 사람이 잘못했어."
"헤어질땐 그런것까지 생각 못하지 않나요."
"그런걸까...."
시간은 어느때보다 느리게 흘렀다. 아카아시는 팝콘봉지 밑바닥을 휘저었다. 서서히 바닥이 드러나고 있었다. 영화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 뒤엔 새까만 암전, 그리고 끝이겠지. 아카아시는 옆에 앉은 이에게 묻고 싶었다. 보쿠토상, 우리의 영화는 몇 분이나 남았나요?
"난 아카아시 혼자 두고 떠나지 않을거야."
"말이라도 고마워요."
"정말인데."
"어떻게 그래요.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기 마련인데."
"아카아시는 벌써 헤어짐을 걱정하는거야?"
옆을 돌아보자 제 모습을 담은 눈이 있었다. 변함없는 믿음이 반짝이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애써 시선을 돌렸다. 미안해졌다.
"그런 건 아니에요."
"그럼 뭐가 걱정인데?"
저 여자처럼, 무거운 짐을 안은 채 혼자 남겨지는 게 두려워요. 제 캐리어에 들어 있는 건 당신의 존재겠죠. 제가 두려운 건 그거예요. 당신을 잊지 못하고 영원히 헤매는 것. 영화가 끝나면 우리의 시간은 전부 꿈이었던 듯 사라질거잖아요. 까만 화면에 당신과 나의 이름이 올라가는 걸 보고나면, 그 다음은 없어요. 끝이에요.
"은근히 쓸데없는 걱정이 많다니까."
"쓸데없는거 아니...!"
"아카아시는 여기 있는 나를 보는게 아니라, 마지막에 있는 나를 보고 있는거잖아. 왠지 섭섭해."
보쿠토가 뚱하니 입을 내밀었다. 아카아시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길을 잃고 헤매던 시선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우울의 늪에 빠져 둔해졌던 감각이 하나씩 되살아났다.
영화 속 여자는 멀리서부터 들리는 차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버스가 한 대 오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평야에 표지판 하나, 여자 하나. 그리고 오직 그녀를 위해 달려오는 버스. 더 이상 걸을 필요가 없었다. 여자의 얼굴에 서서히 웃음이 번졌다. 바로 고개를 들면 표지판이 있는 것을, 먼 곳만 보고 걷느라 발견하지 못했다.
"있지. 아카아시는 날 좋아해?"
"네."
"나도. 지금 내 옆에 앉아있는 아카아시를 무진장 좋아해."
종이봉투가 아카아시의 손에서 떠났다. 하얀 팝콘이 눈처럼 쏟아졌다. 제것보다 조금 작은 손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여자는 버스를 타기 전, 자신히 걷고 있던 황야를 돌아보았다. 거기엔 끝이라는건 없었지만, 버스는 최소한 그가 낡은 의자에 기대어 잠들 수 있게 해 주었다.
사방이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졌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고 있었다. 칠흑같은 어둠이 내려앉으면 단지 영화가 끝난 것 뿐인것을. 바로 옆에 손을 잡으며 가자, 라고 빛으로 이끄는 사람이 있음을 잊고 있었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커튼을 흩날렸다. 별빛을 담은 파도소리가 흘러들어왔다.
"언젠가 우리가 헤어지는 날이 온다고 해도, 그게 오늘은 아냐."
이마에 가벼운 입맞춤이 닿았다. 프로젝터는 빈 화면을 비추며 홀로 돌아가고 있었다. 아카아시는 시선 조금 위에서 빛나는 눈동자를 마주보았다. 그 안에 담긴 제 모습은 생각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우울에 잠식된 케이지가 아니라, 사랑받고 있는 아카아시였다.
"그러니까 오늘을 살아. 먼 곳은 보지 마."
깜박이는 흐린 빛 아래서 서로를 가득 담았다. 영화는 끝난 지 오래였다. 과거와 현재를 지나, 지금 여기서 새로운 영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검정은 엔딩이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