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애소설을 써주세요
-리아
첫사랑이라는 주제는 어딜 가도 흔하게 접하는 단어였다. 너무 자주 접해서 오히려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단어를 누군가의 입을 통해 들었을 땐 오히려 낯설었다. 적어도 고등학교 2학년인 아카아시에게는 그랬다. 그동안 이 막연한 단어를 얼마나 많은 사람을 통해 들었는지 모른다. 언제나 한 귀로 흘려들었던 그 이야기들이 모이고 모여 아카아시의 마음 한구석에 작게 고였다.
내 첫사랑은 소설 속에 나오는 이야기 같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어떤 연애 소설을 감명 깊게 읽었다거나 인상 깊은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린 것은 아니었다. 그저 언젠가 겪게 될 일이라면 소설에 나오는 일 같이 기억하고 싶을 만한 일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이토록 막연한 생각은 저와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물어오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나온 것이었다. 만약 내일 물어봤더라면 달라졌을지도 모를 대답은 상대방의 입을 통해 다시 한 번 내뱉어졌다.
“소설 속에 나오는 첫사랑….”
“보쿠토 선배?”
답지 않게 꽤 진지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는 게 마치 다음 날 있을 영어 단어 테스트라도 준비하는 듯했다. 물론 아카아시는 그와 함께 학교에 다닌 지 1년 하고도 한 학기가 더 지난 지금까지 그가 단어 테스트를 준비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사실 보쿠토의 진지한 표정이라고 해봤자 배구 할 때뿐이었기에 아카아시는 그 모습이 꽤 낯설게 다가왔다.
보쿠토는 원래 보폭이 크고 빠른 편이었다. 그런 그가 언제나 아카아시의 걸음 속도에 맞춰 걷곤 했는데 드물게도 오늘은 아카아시가 보쿠토의 속도에 맞춰 걸어야만 했다. 평소의 반절도 안 되는 속도로 다리를 움직이니 괜히 눈을 움직여 주변을 둘러보게 되었다. 여름이 지나고 다가온 가을 덕분에 해가 짧아졌다. 붉게 타오르던 하늘은 금세 어두워져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남자아이라면 한 번쯤 생각해볼 주제였지만 아무래도 보쿠토는 꽤 깊게 빠져있는 거처럼 보였다. 그게 하필 제 첫사랑 이야기라 아카아시는 답지 않게 뒷말을 붙였다.
“누구나 생각하잖아요. 첫사랑은 좀 로맨틱하고….”
“로맨틱이란 뭘까….”
“글쎄요. 보쿠토 선배랑은 별로 안 어울리는 단어네요.”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제자리에 굳어 움직이지 않는 보쿠토 덕분에 아카아시 역시 제자리에 멀뚱히 멈출 수밖에 없었다. 느렸던 걸음만큼 느리게 뒤를 돌아보자 저보다 한 발짝 뒤에 서 있는 보쿠토의 눈동자가 보였다. 그 눈 위에 띄워진 빛이 억울함을 담고 있는 것 같이 보였지만 아카아시는 그저 입을 다물고 그 눈을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가. 보통의 남자 고등학생이라면 저보다 한 살 많은 부 활동 선배에게서 로맨틱한 무언가를 느끼는 일은 거의 없을 테니까. 그런데도 그 한 살 많은 선배의 눈은 정반대를 말하고 있는 것 같아 말을 아낄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볼 때 이럴 땐 조용히 보쿠토의 말을 기다리는 게 상책이었다.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용수철이라도 달린 듯 잔뜩 뾰로통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내가 왜 로맨틱한 게 안 어울려?! 어울리거든?!”
“왜 안 어울리시는지 저야 모르죠.”
“됐어. 나 오늘 아카아시랑 같이 집에 안 가.”
“내일 뵙겠습니다.”
뚱한 얼굴에 괜히 한마디 거들어버렸다. 아카아시는 이미 가겠다는 말을 뱉었음에도 여전히 그 자리에 서서 보쿠토의 눈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정말 이대로 가버리면 내일 답도 없을 정도로 삐쳐있을 게 뻔한 제 선배임을 너무나도 절절하게 알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이번에도 아카아시가 먼저 굽힐 수밖에 없었다.
“제가 잘못했어요. 같이 돌아가요.”
“됐어. 나 들릴 곳 있어서 안 돼.”
먼저 나온 사과의 말에도 불구하고 보쿠토는 여전히 뾰로통한 표정으로 아카아시를 바라볼 뿐이었다. 꽤 단호한 모습에 오히려 아카아시가 당황했다. 팔짱까지 낀 채로 서 있는 보쿠토의 태도에 아카아시는 말을 반복했다.
“저 정말 혼자 갑니다?”
“혼자 가.”
“저 진짜 진짜 혼자 가요?”
“진짜 진짜 진짜 혼자 가.”
몇 번을 되물어도 한결같이 등까지 떠밀어가며 말하는 보쿠토의 모습에 아카아시는 내일 절대 이 일로 삐치지 않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내고 나서야 걸음을 옮겼다. 손가락을 걸고 한 약속으로도 부족해 한걸음에 같은 질문을 한 번 더 건네고 나서야 홀로 돌아가는 아카아시의 뒷모습을 보며 보쿠토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어, 시로후쿠. 지금 바빠? 나랑 서점 가자.”
* * *
아카아시는 생각했다. 다시는 보쿠토와의 약속을 믿지 않을 거라고. 분명 어제 하굣길에서 몇 번이나 당부의 말을 남기고 돌아갔는데 그 수 많은 이야기 중에 보쿠토의 머릿속에 남은 것은 그저 하굣길에 자신에게 로맨틱함이라곤 느껴지지 않는다는 말을 남기고 혼자 가버린 매정한 후배 한 명뿐인 것 같았다,
“아카아시, 지금 좀 소설 같아?”
“어느 소설 주인공이 자기가 소설 같냐고 물어봅니까.”
도대체 어디서 뭘 보고 온 것인지 아침에 모닝콜이라는 명목으로 평소 아카아시의 기상 시간보다 30분이나 빨리 전화해서 잠을 깨우질 않나, 아침밥을 먹었다고, 먹었다고 이야기해도 굳이 자기가 싸온 도시락을 먹으라고 내밀질 않나, 심지어 체육 시간이라 운동장에 나가 수업을 하는 아카아시에게 인사하겠다며 제 교실 창가에서 손을 흔들다가 수학 선생님에게 귀가 잡히는 일까지 있었다. 놀랍게도 이 많은 일이 모두 점심시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과거의 자신을 만나면 절대, 절대 제 선배를 홀로 집에 보내지 말라고 어깨를 붙잡고 말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이상하네….”
“그러게요. 뭐 잘못 드셨습니까.”
“나 잠깐 다녀올게.”
“제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고 계시네요.”
뒷목을 주무르며 제 시야에서 멀어지는 보쿠토의 등이 교실 뒷문에 가려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고 나서야 아카아시는 한숨과 함께 책상 위에 올려진 청포도 사탕을 바라봤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껍질을 벗은 사탕이 연둣빛을 내고 있었다. 그 작은 알맹이를 입에 넣자마자 퍼지는 단맛에 아카아시는 숨을 삼켰다.
이 사소하지만 피곤한 일은 부 활동 시간까지 이어졌다. 이유 모를 보쿠토의 행동은 기어코 배구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말았다. 아카아시의 기분을 살피는데 정신이 팔린 보쿠토는 이번에도 스파이크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고 체육관에는 배구공이 통통 튀는 소리와 부원들의 숨소리로 가득 찼다.
“보쿠토 선배.”
기어코 찾아온 아카아시의 낮은 부름에 보쿠토는 물론 다른 부원들도 그를 바라보았다. 땀에 젖은 채 침착한 듯한 그 얼굴이 묘하게 구겨져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부주장의 모습은 잔소리가 길어질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눈치가 빠른 3학년들이 다른 아이들을 이끌고 자리를 비켜주고 나서야 아카아시는 느리게 입을 열었다.
“선배.”
“으, 으응….”
“오늘 스파이크 실수가 벌써 8개입니다.”
“벌써 그렇게 됐나….”
“보쿠토 선배.”
“압니다. 8개 실수했습니다.”
제 이름을 한 번 더 듣고 나서야 반성의 뜻을 비치는 보쿠토의 모습을 뒤로하고 아카아시는 바닥에 널브러진 공을 하나씩 주워 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보쿠토는 어찌할 줄 모르는 두 손을 공중에서 허우적거리며 아카아시의 뒤를 졸졸 따라다가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 오늘 진짜 연습 열심히 하려고 했는데, 어, 그게, 생각할 게 조금 있었는데…. 그게 마음처럼 잘 안 풀려서 조금 집중력이 흐트러진 거뿐이야, 나 이제 진짜 열심히 할 수 있어!”
“열심히 공 줍는 거나 도와주시면 안 됩니까. 오늘 도저히 연습 더 못 하실 거 같은데요.”
“나 할 수 있다고.”
배구공을 들고 있는 아카아시의 손이 보쿠토에 의해 가던 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차마 세게 잡지도 못하고 손목시계보다 헐렁하게 잡혀있는 제 팔목을 바라보던 아카아시는 고개를 올려 그 손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뭐가 그렇게 억울한지 샛노란 눈동자가 어쩐지 울먹이는듯한 기분에 아카아시는 이번에도 먼저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저 애처롭게 빛나는 눈망울에 도통 내성 생기질 않았다.
“배구요, 아니면 소설 주인공 따라 하시는 거요.”
“… 둘 다.”
“거짓말 마세요. 보쿠토 선배 한 번에 한 개 하기도 힘든 사람이잖아요.”
“도대체 아카아시는 날 뭐로 보는 거야?”
“보쿠토 선배로 보죠.”
한숨과 함께 나온 대답은 아무래도 보쿠토의 마음에 드는 정답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잡고 있다기보다는 감싸고 있는 듯 힘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던 보쿠토의 손이 아카아시의 팔목 위에서 떠나갔다. 보쿠토의 고개가 떨어진 딱 그만큼 처진 어깨가 아카아시의 눈을 사로잡았다.
“아카아시는 하나도 몰라.”
“제가 뭘요.”
“오늘 연습 그만하자. 내가 정리할 거니까 아카아시는 그냥 돌아가.”
잔뜩 토라진 보쿠토의 목소리에 아카아시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 같았다면 한 번쯤 더 굽히고 들어갈 법했지만 온종일 보쿠토에게 시달려온 아카아시는 진작부터 진이 빠져있었다. 손에 들려있는 공을 원래 자리인 바구니 안에 넣고 나서 가벼운 눈인사를 마치고 체육관을 나가기 위해 문을 열었다. 눈높이를 맞춘 태양이 햇빛을 쏟아냈다. 시야를 가득 덮친 그것에 잠시 눈을 감고 서 있는 사이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아카아시를 소설 주인공으로 만들어주려고 했던 거였어.”
눈을 감고 있으니 청각이 예민해진 것 같았다. 체육관 바닥과 그의 운동화 사이의 작은 마찰음이 또렷하게 들렸다. 공을 줍고 있는 건지 등 뒤에서 작게 ‘잇챠’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터질 뻔한 웃음을 억누르며 아카아시는 제 오른손을 습관적으로 주물렀다.
“그, 내가 아카아시 첫사랑 해주고 싶으니까. 어제 시로후쿠랑 서점 가서 제일 잘 팔리는 연애 소설도 추천받아서 밤새 읽었어. 아카아시한테 해주고 싶어서. 이렇게 싫어할 줄 몰랐지만…. 책에서는 주인공이 사탕 주니까 칭찬해주고 그랬다고. 아카아시처럼 막 잔소리 안 했는데.”
흐려지는 말끝에 아카아시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오늘 온종일 시달렸던 일이 조금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눈부셨던 노을빛에 조금 익숙해지는 것 같아 그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텅 비어있는 운동장은 온통 노을 범벅이었다. 이미 주황색으로 반짝이는 햇빛 속에 서 있는 제 운동화 끝이 노을에 젖어있었다.
“보쿠토 선배.”
“왜.”
“소설의 주인공은 자기가 소설 안에 있다고 생각할까요.”
보쿠토가 만들어 내던 작은 소음이 멈췄다. 그 작은 소음이 사라진 빈자리가 느껴질 때쯤 아카아시가 몸을 돌렸다. 길게 뻗은 제 그림자는 보쿠토의 발끝에 닿아있었다. 노을은 체육관 깊숙이 들어가 그를 감싸고 있었다.
“누군가 우리 이야기를 써준다면.”
한 발자국 다가가자 그의 배구화 위로 제 그림자가 겹쳐졌다. 두 걸음 다가가니 종아리를 덮고 세 걸음 만에 온 시야가 보쿠토로 채워졌다.
“그때 소설 같은 첫사랑이 되는 거 아닐까요.”
“아카아시는 항상 말을 어렵게 하더라.”
“그냥 보쿠토 선배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괜찮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다른 소설 따라 할 이유가 없잖아요. 하던 대로 하세요. 그 소설 보쿠토 선배가 써주세요.”
“아카아시가 난 로맨틱이랑 안 어울린다며.”
“선배는 어울린다고 말씀하셨잖아요.”
보쿠토의 손에 들려있던 배구공이 떨어졌다. 통통 튀기며 멀어지는 그 공을 보는 사람은 없었다. 서로를 바라보던 네 개의 눈동자가 동시에 감겼다. 태양을 등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아카아시의 감긴 눈앞에 또 다른 태양이 떴다. 머릿속까지 노을에 물들어가는 듯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