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괴하는 불꽃
-비취
나를 부여잡는 당신의 손이 내 어깨에 얹히면 언제나 온몸이 불타는 듯한 격렬한 통증이 느껴집니다. 당신의 눈동자는 나를 가두는 감옥과도 같고 그 입술은 나를 걸어 잠그는 자물쇠니 내가 당신을 떠나 갈 곳 그 어디이겠습니까. 단지 타오르는 당신만이 내 곁에서 모든 것을 파괴하겠지요.
네, 그대를 사랑하는 마음에
제 자신마저 타고 있습니다.
타앙-
“보쿠토 상.”
공을 보내는 손끝이 살짝 떨린다. 그러나 그 불안한 토스로 당신은 잘도 때려댄다. 공이 경쾌하게 딱딱한 체육관 바닥에 부딪히고, 나는 나마저도 그 바닥에 형편없이 내동댕이 쳐진다는걸 느낀다. 당신을 사랑하는 이 배덕한 마음으로 코트에 서있을 수 없는 난 죄인이다.
“아카아시!! 나 잘했지!!”
당신의 열정이 날 잠식해 갈 때 나는 소름을 느낀다. 건드려선 안 될 미지의 영역은 문이 굳게 닫혀있다. 그러나 나는 그 문을 비틀고 비좁은 틈에 발을 한 발짝 걸쳐 그 안을 엿보고 있다. 당신을 사랑하는 나는 항상 나쁜 짓을 하는 어린아이 같다. 들켰으면 하는 묘한 기대와 불안감을 동시에 느끼니. 당신의 황금빛 벽안이 불꽃처럼 일렁여 나를 홀리고 내가 한 발 더 내딛는 바로 그 순간. 당신이 나를 삼키고 잠식해나가 내 모든 것을 빼앗을 거라는 묘한 공포심에 사로잡힌다. 으으, 묘한 소름에 등줄기가 서늘해진다.
“네. 잘하셨어요.”
“헤이헤이헤이-!!”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착각, 착각일 것이다. 이렇게 단순한 그대가 대체 어떻게 나의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겠는가. 피식- 저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이상한 상상에 담담한 실소가 절로 나왔다. 나도 참,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요즘 잠만 자면 당신이 아른거리는 통에 수면시간이 부족해서 그런지 잡생각이 많아졌다. 뻐근한 목이 우둑우둑 소리를 냈다.
“뭐야 그 비웃음은!!”
흘린 실소를 보쿠토상이 따지고 들었다. 하아, 눈앞이 살짝 어지러웠다. 씩씩거리며 나의 눈동자 바로 앞에 그 호박색 눈동자를 들이댄 당신이 날 빤히 보고 있었다.
“어, 아카아시 어디 아파?”
“안아픕니다. 비웃음 아니고요. 그리고 지금은 경기 중인데요.”
그 말에 당신은 다시 뒤돌아 코트 너머를 노려본다. 나는 저 아찔한 눈빛을 잘 알고 있다. 아아, 한없이 아름다운 사람. 경기 중에 당신은 왜 이리도 진중한지, 내가 빠져들 수밖에 없게. 이 넘칠 것만 같은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는 것만으로도 내 모든 신경을 다 쓰느라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경기 종료! 1세트 20-25, 2세트 19-25로 후쿠로다니 학원의 승리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차갑게 울린다. 언제부터 주말이 싫어진 건지. 아마 그대의 따뜻한 열기를 느끼지 못해서일 것이다. 그래도 그대의 모습이 내 눈동자에 남아있는 한 나는 그대를 느끼고 그대를 만지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가능한 한 오래 기억하려 기억의 실마리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아카-시!”
당신의 경기 중 모습을 다시 떠올리며 애써 기분 좋게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나를 당신이 잡는다. 진지한 눈동자가 나를 헤어 나올 수 없게 만든다. 무슨 일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대의 입에서 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 그리 큰 목소리가 아닐 때조차 내 가슴을 무겁게도 두드려대니. 심장이 울리고 머리는 새하얘진다. 표정관리가 어렵다는 말이 이래서 나왔나보다.
“나.. 나 아카아시랑 사귀고 싶어!!”
이건 꿈이다. 이건 꿈이다. 너무 보고 싶어서 집에 돌아가자마자 이 꿈을 꾼 거야. 이건 꿈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일단 꿈이든 말든, 조금 웃어도 될까.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당신 꿈을 또 꾸고, 얼마나 듣고 싶었으면 꿈에서 이런 말까지 나올까. 제 자신과 헝클어진 머리의 보쿠토상이 우습고 유쾌해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푸하하하하!”
“아카아시!!! 나 이거 진심으로 말하는 거라고!!”
“하하..하..”
갑자기 눈물이 나왔다. 혼자서만 땅에 고개를 숙이고 걸어온 이 길에 당신이 태양같이 이글거리며 서 있다. 너무 환하고 너무 밝아서 눈이 멀 것만 같다. 그래서 울었다. 눈이, 당신의 밝은 빛에 너무 따가워서.. 당신을 너무 좋아하게 되어버려서..
“좋아합니다, 보쿠토 선배.”
내 말에 얼굴이 붉어지는 당신이 사랑스럽습니다. 사소한 몸짓 하나, 그 표정 하나가 날 미치도록 날뛰게 해요.
“좋아해요.”
“아, 아카아시 울어?! 그보다 그건 반칙이야!!”
내 눈물에 당황해서 쩔쩔매고 나 때문인가 싶어 심각하게 고민하는 모습에 다시 한 번 반하고 만다. 이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울고 싶어졌다. 어쩌죠, 보쿠토상. 저 지금 너무 기뻐서 좀 울어야 할 것 같은데요.
“아 정말 왜 우는거야-!!”
그 꿈들이 예지몽이라도 된 걸까. 아니면 본능이 경고를 보낸 걸까. 당신은 너무 강렬히 빛나서 나를 다 태우고 만다. 나마저도 태워서 당신을 사랑하는 연료로 쓰고 만다. 나 그리고 당신 서로가 만나 불타고 남은 것은 한 줌의 재와 반짝이는 사리들 뿐이다. 당신은 끝내 내 모든 것을 가져가 불사르고 만다. 사랑이 이렇게 뜨거워서 나를 울리고 만다.
그래서 당신은 파괴하는 불꽃.
